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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의 일본 유학기

일본 유학 시절 '무결석,무지각'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

일본어가 안 되는 사비 유학생이 필히 거쳐야할 일본유학의 관문, 일본어 학교...
쿤도 98년 04월부터 00년 03월까지 2년간 일본어학교에 다녔다.
(원래 계획은 1년 뒤 귀국이었으나, 어쩌다보니 2년을 다니게 됐다.)

하지만, 쿤은 그 2년 동안에 쿤이 다녔던 일본어학교에 대대적인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 기록이란 바로
무결석 무지각.

해외로 어학연수를 다녀본 사람은 랭귀지과정에서 무결석, 무지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것이다. 하지만 쿤은 무결석을 하겠다고 의식하지는 않았다. 단지, 학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어릴 적부터 있었다. 게다가, 학교에 낸 돈이 아까워서 빠질 수도 없었다. (무지 비싼 일본어학교 수업료.. 빠질 수 없지..)

그리고 쿤은 일본에서 대학을 들어가게 됐다. 계획에도 없는 입학이었다. 돈이 없어 입학 여부는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운 좋게도 수업료 면제에 장학금까지 받는 조건으로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학을 하게되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는데, 문제가 생겼다. 신원보증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학입학에 왠 보증인??)
지금은 신원보증이 필요없는 학교도 많아졌으나 2000년에는 입학 뒤에 자취를 감추는 유학생이 많았던 관계로 꼭 필요했었다.
신원보증인이 하는 일은 학생의 학비문제와 학교생활 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것을 책임지고 보증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학생들은 대부분 부모가 보증인이 되지만, 유학생은 따로 일본인 신원보증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이 누가 선뜻 보증을 서 주겠는가? 그것도 외국 국적의 돈없고 가난한 유학생에게 말이다. 그러다보니, 쿤은 입학하자마자 엄청난 암초에 부딪친 것이다. 다른 유학생들은 1년 2만엔 정도에 보증인회사를 통해서 보증을 받았지만, 쿤에게 있어서 그 방법은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왜냐??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생각 끝에 2년간 다녔던 일본어학교를 찾았다. 수 많은 외국인이 대학을 들어가니까 뭔가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40대 중반의 교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쿤    :  한 달전에 졸업한 졸업생인데,, 아시죠??
교직원 :  쿤을 모르면 여기(학교) 사람아니지..
   쿤    :   (잉? 먼 소리,, 암튼) 제가요.. 조금 난감한 상황에 빠졌거든요..
교직원 :  무슨일인데?
   쿤    :  (신원보증 서류를 내밀며) 이건데요.. 대학 가는데 신원보증인이 필요하데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교직원 : 어디보자..(약 10초 정도 속독을 하더니) 나라도 괜찮다면, 사인해 줄 수 있는데...
   쿤    :  엥? 정말요? 저야 감사하죠. 부탁드려요.
교직원 :  (웃으며 싸인)

   쿤    :  (서류를 받아들고 회심의 미소)그런데요, 왜 선뜻 사인을 해 주셨어요?
            학비 문제도 있고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교직원 :  난 단 한 가지로 학생을 평가하거든..

   쿤    :  단 한 가지요?? 그게 먼데요?? 
교직원 :  학교 생활에 있어서 근면함이지. 성적이 우수한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아니지. 학생의 근면함이란 출석으로 알 수 있지.
 
            쿤은 이 학교 36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무결석 무지각을 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
            그것도 2년이나 다니면서 말이지..
더 이상은 평가할 필요가 없는 증명된 사람이지.


2000년 당시 쿤이 다닌 일본어 학교는 개교 36주년이었다고 한다. 그 36년간을 통털어서 처음 나온 무결석 무지각이었던 터라 일본어학교 선생님을 비롯하여 교직원 사이에서도 큰 화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졸업을 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쿤의 유학생활에 여러모로 힘이 되어주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집세부담의 연대보증인이 되어주었고, 일본내에서 긴급연락망이 되어 한국의 부모님과 다리 역활을 해 주었다. 한국어 알바가 필요할 때는 서슴없이 연락도 해 주었다. 염치불구하고 서류상담을 받으러 간 자리에서 쿤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었다.

그녀와의 인연은 일본 생활 13년 째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집사람 다다다와는 언니,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쿤과 다다다의 어머니가 되었다.
 
3년 전에 다다다와 그녀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 몇 점을 공개한다.
(쿤과 다다다의 얼굴은 다다다가 싫어라 해서 공개를 못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허락을 받았기에 공개합니다.)

우리가 놀러가자 다도를 경험시켜주시겠다며 손수 차를 끓이시고 계신 모습..
 
                         
그녀의 어머니는 일본 다도(茶道) 선생님이시다. 
전직은 학교 교사였기에 다다다와도 통하는 게 많은지 둘은 모녀처럼 금세 친해졌다.
(다도에 관한 포스팅도 언젠가 할게요.)


다다다가 좋아하는 우리 가족사진이다.
저 날은 쿤과 다다다도 바빠서 서로 대충 옷을 챙겨입었던 날이었다.
집에가서 사진 한장을 찍자며 각자 코트를 벗으니 셋이 노란색 계열의 줄모늬 모양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특별한 인연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1일 나들이 때..다다다, 어머니, 그녀


쿤과 다다다의 결혼식 때 기모노를 입고 결혼식에 참여한 그녀.
(뱅기표와 호텔 등은 쿤이 부담했다. 출혈은 좀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동안 받은 은혜의 일부를 갚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인연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까..
전화나 메일은 물론이요, 한국에 다녀올 때 마다 선물을 사다드리기도 하고, 하룻밤 자고 오기도 하고, 매년 연하장을 주고 받는다.


쿤이 다녔던 일본어 학교는 올해로 46주년이 됐다.
하지만, 무결석 무지각의 기록은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록일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쿤이 무결석, 무지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어쩌면 어릴 적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오후반 수업에 안 가고 오락실에서 놀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학교에 안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다녔다. 열이 나서 조퇴를 하고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일단 무조건 학교에 갔다. 대학, 대학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대학원까지의 학창 시절 중 학교에 빠진 날은 단 하루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초등학교 2학년 때 오락하다 혼쭐이 났던 그날이다. 때로는, 그 하루조차 아쉽기도 하다.


혹시라도 일본 유학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대단한 무언가를 만들려고만 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지키고 실천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무결석, 무지각과 같은 작은 실천으로부터 꿈과 희망, 그리고 인연 등은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