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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사는법

가계부 쓰는 남편과 잘 사는 방법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나(다다다)의 이야기이다.
나는 가계부 쓰는 남자(쿤)와 살고 있다.
우리 남편 쿤은 1년 4계절 365일 가계부를 쓴다.
쿤은 일본으로 유학을 와서 돈 씀씀이를 파악하고자 취미를 겸해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한국과 일본으로 갈라져서 무려 2년이 넘는 시간을 따로 살았다.
한국에 살때 내가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충고가 있었으니..

다다다샘, 따로 살면 돈 문제는 어떻게 하고 있어?
일단, 결혼 초반에 경제권은 딱 쥐어야 하는 거 알지?
처음에 놓치면 힘들어~!! 잘 잡으라구...

그런데, 떨어져서 따로 살다보니 같이 관리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대로, 쿤은 쿤대로 각자 관리를 했다.

가끔 쿤은 내 월급이나 보험, 저축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했다. 나조차도 정확히 내 경제상황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제적인 문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반면 쿤은 메신저를 통해서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해 나에게 자주 보고를 하고는 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어 일본 집에 오면, 자신의 가계부(엑셀)를 펼쳐보이며, 일일이 나에게 설명을 해주고는 했다.

다다다, 봐봐. 내가 올해 들어서 번 돈이 얼마야. 
근데, 세금으로 뜯긴 게 이렇게 많아. 에휴..
지난 1년 동안 쓴 전기세, 수도세..등의 공과금은 얼마구...
식재료나 외식비로 이 정도가 나가고 있어..
차량유지비는 얼마, 1년에 저축하는 돈 얼마,
통장은 이런저런 용도로 나뉘어져 있어.


이런 이야기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는 늘 건성으로 듣고는 했다.  왜 그렇게 신이나서 보고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다가 무심결에 동료 선생님들에게

우리 남편은 일본에서 가계부를 쓰고 있어요.

라고 말하자 동료 선생님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다다샘, 아무래도 경제권 빼앗기겠다. 둘이 살림 합치면 가계부 문제부터 잘 해결하라구..
이건 결혼 선배로서 하는 충고야. 남자가 가계부를 쥐면 여자가 아주 피곤해지거든.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버는 돈에 대해서 만큼은 어떠한 구속없이 자유롭게 쓰던 내 생활을 돌아보니, 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씩 반찬값을 타서 쓰는 친구 어머니의 빡빡한 삶도 떠올랐다. 만약 일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간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어쩌면 그러한 두려움이 나를 2년이나 한국에서 버티게 했는지도, 그토록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도록 채찍질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 경제권은 고사하고 경제력이라도 없으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두려움과 함께 나는 일본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가계부 때문에 좀 짜증이 나기도 했다.
내가 쓰는 돈에 대해 "가계부에 적어야 한다" 며 꼬치꼬치 묻는 게 싫었던 것이다.

가계부를 매일 쓰는 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것 같아 기분도 좀 그랬다.
일본에서는 더이상 내 이름으로 된 월급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니 비참해졌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오해라고 생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쿤은 점심값과 차량주유비를 제외하고는 돈을 쓸 때 꼭 내 허락을 받았다. (참고로 난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이 없다.)

다다다, 내가 요즘 꼭 가지고 싶은 게 있거든..그거 사도 될까? 
한국에 부모님께 용돈 좀 드리려고 하는데 얼마 보내드릴까?

쿤은 단 한번도 내 허락없이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반면 다다다는 쓰기 전에 허락을 받지 않는다. 살림의 중심이 여자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대신 쓴 내역은 꼭 알려준다.)

그렇다. 우리는 쿤이 가계부를 쓰지만 그에게 경제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월급이 통장으로 들어오는 쿤,, 그리고 현금으로 직접 돈이 들어오는 다다다.
언제나 손에 돈을 쥐고 있는 것은 다다다이고, 돈을 쓰는 것도, 쿤의 지갑에 돈을 넣어주는 것도 다다다이다.
쿤이 가계부를 쓴다해도 마치 내가 경제력을 쥐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쿤이 하는 일은 가계부를 기록하고 돈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누가 얼마를 더 버는 것과 상관없이 쿤, 다다다 라는 이름의 통장에 돈을 반반씩 넣어 저축한다.
아니 쿤이 그리 해주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쿤이 훨씬 많이 버는데도 저축의 반은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들어가는 것이다.(그렇다고 그 돈이 개인의 돈이라는 생각은 없다. 부부이므로 우리 둘의 돈이지만, 나를 존재성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쿤이 버는 돈은 저축용으로 다다다가 버는 돈은 생활비로 쓰는 우리집 경제 흐름상 쿤의 이런 배려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 쿤을 보면서 동료 선생님들의 충고도, 부부 싸움의 빌미가 된다는 내 돈 네 돈이라는 개념도 다 없어졌다.
 
가계부 쓰는 남자와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은 이유

우리집에서 쿤이 가계부를 쓰는 것은 나보다 쿤이 훨씬 잘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전형적인 문과생 다다다는 숫자 이야기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난다.
반면, '인간 계산기'라는 별명을 가진 쿤은 9년 간의 자취생활이 무색하지 않을 뿐더러, 숫자의 천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계산이 빠르고 빈틈이 없다.(식당이나 슈퍼에서 점원의 틀린 계산 쯤은 쉽게 집어낸다. 그렇다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 온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가계부 쓰는 쿤과 살아보니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다는 걸 느낀다.(나쁜점이란 가계부를 쓰는 남자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이므로 생략한다.)

계획성 있는 생활이 가능해진다.
쿤은 12월 말이 되면 이듬해의 수입, 지출, 저축 예상액을 미리 뽑아놓고 한 해를 시작한다.
곧, 올해 결산을 앞두고 있는 우리 집 가계부..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쿤    :
다다다 올해 저축 금액이 조금 부족할 것 같아. 한달만 좀 줄여볼까?
다다다  : 얼마나 부족한데..?
   쿤    : 7만엔(약 90만원) 정도..
다다다  : 7만엔??

일본에서 7만엔이라는 돈은 한국을 한번 갔다 올 수 있는 두사람의 비행기표에 불과하다.(여행경비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1월 중순에 뜻하지 않게 한국을 다녀온 일이 생각났다. 결국 그 때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쿤이 예상한 저축 목표액은 정확히 달성한다는 말이 된다.(너무 정확하다 보니, 할 말이 없다)
쿤은 우리 집의 과거, 현재, 미래의 경제상황을 모두 한눈에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집 경제에 있어 "왜 돈이 이렇게 없지? 도대체 번 돈 다 어디갔어?" 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입출금 통장, 세금 관리 전문가가 필요없다.
우리집 가계부에는 수입, 지출 내역 뿐만 아니라 한국의 보험, 통장, 일본의 보험, 통장, 세금까지 다~ 얽혀있다. 그 모든 통장의 입출 내역이 한데 맞물려 돌아가다 보니, 빈 틈이 생기지 않는다. 
쿤이 쓰는 가계부는 단순한 기록용이 아니다. 치밀하게 분석하고,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점을 찾아낸다.
그 가운데 재테크도 생각하게 되고, 미래의 경제를 꾸리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자산관리사와 사는 기분이 든다. 
작년에 학교에서 일할 때, 월급이 잘 들어왔는지 체크해주는 사람 또한 쿤이었다.
올해 프리랜서가 되면서 들어오는 수입이 일정하지가 않고 수입 내역서라는 건 아예 없다. 그런데, 수업을 할 때마다 받는 개인 레슨비를 학생이름을 넣어 따로따로 기록해준다.(한 두명도 아니고,,매주 넣으려면 아주 귀찮은 작업임에 분명하다)..쿤의 가계부가 있기에 어떤 학생이 1년에 얼마나 나에게 레슨비를 냈고, 몇 번이나 레슨을 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 기록을 죽 보더니 쿤이 그런다. "다다다의 한국어 알바 연봉이 생각보다 좀 되네..." 흐지부지 될 수 있는 불규칙한 돈을 모아 연봉으로 만들어주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우리가 여행을 많이 갈 수 있는 이유를 알게되다.
남들은 우리가 돈이 많아 여행을 간다고 생각한다. (쿤과 다다다가 함께 한 여행지는 2010.11.27 현재 17개국, 약 50여개 도시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역시 가계부 덕이다. 일년의 예산과 돈의 흐름을 한 눈에 알고 있는 쿤이다 보니, 여행지로 갈 수 있는 나라와 여행 경비로 얼마를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예상도 가능해진다고 한다.
그런 예상이 가능하기에 쿤은 비행기표를 빠르면 6개월 전에 저렴하게 구입한다.

가계부를 쓰는 쿤을 보고 다다다가 가장 감탄하는 것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는 꾸준함이다.
우리집 가계부 이야기는 내 친구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해져서 몇몇의 친구들이 쓰기 시작했지만, 작심삼일이 되거나 계산이 맞지 않아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는 걸 많이 봤다. 그만큼 간단하지 않기에 누구나 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쿤 말로는 당일 가계부 쓰는 시간은 약 1~2분.. 월말은 약 10분, 연말에는 올해의 결산과 내년의 계획을 세워야 하는 관계로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가계부 쓰는 남자에 대한 편견이 많다.
또, 그런 남자와 사는 여자를 처량하게 보는 사람도 많다.
투명하게 진행되는 우리집 경제 상황을 본 사람들은 긍정적인 면보다 답답하지 않냐는 의견을 조심스레 비춘다. 하지만, 규모있는 살림을 꾸리기 위해 가계부를 쓰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런 편견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가계부는 누가 쓰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둘 중 잘 쓰는 사람이 쓰는 것이 가장 좋다.
다만, 그것을 자신의 경제권으로 착각하고 권력처럼 남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끊임없이 상의하고 협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딴 건 몰라도 우리 부부는 돈 때문에 싸운 적은 지금까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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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에게 우리집의 가계부를 공개하자고 했더니, 금액까지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는 건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가계부의 틀은 공개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일부 공개하고 싶어 열어봤으나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크하하하..

쿤의 가계부 공개...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