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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사는법

한국의 직장을 버리고 일본행을 결심하게 한 남편의 말 한 마디

2년 전 2009년 1월 초의 이맘때가 생각난다. 
남들은 새해 덕담을 나누며 새로운 목표를 세울 때 나는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 
결혼을 한지 2년이 다 되어 갔지만, 명색만 부부일 뿐 나는 한국에서, 쿤은 일본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한국에서 정착할 지, 일본에서 정착할 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상태에서도 결혼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겠지만, 어떤 장애가 생겨도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답이 나올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나는 한국의 직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또, 쿤은 한국에서의 취업이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 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다.
쿤이 일본에서 살고 싶어 했던 이유는, 언제든 휴가를 내 여행이 가능하고, 칼퇴근, 주말 휴일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회사를 원했기 때문이다. 또, 여러 나라에서 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던 쿤은, 다른 나라로의 이동이 자유로운 일본 직장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모든 직장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쿤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대로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쿤을 잘 설득해 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는데도 결국 어떠한 답도 나오지 않았다.

함께하지 못하는 아픔과 그리움이 커져갔다.
촉각과 후각이 배제된 메신저 속에 담긴 쿤을 보는 것에도 지쳐갔다.
누군가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던 2009년 1월의 어느 날,
흔히 한국에서 철밥통이라 불리는 직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일본행을 택하게 된 계기가 생기게 된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메신저를 켜놓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자릴 비웠다 돌아오니 쿤이 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생의 유학생활에 대한 충고나 구직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쿤의 동생은 내가 없는 일본 집에서 일본어 학교를 다니며, 일본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헤드셋을 쓰고 드라마를 보고 있었기에 대화를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아, 보고 있던 드라마를 접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쿤은 내가 듣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결혼한 몸이야.
너보다 형수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 촌수에 대해서 들어봤지?

나를 낳아준 부모가 1촌, 피가 섞인 네가 2촌이지.
그런데 피 한방울 안 섞인 형수는 나와 무촌(無寸)이야.
그게 바로 결혼이고 내 가족이라는 거지.


언젠가 유행했던 타고 가던 배가 침몰하면 누구부터 구하느냐 하는 이야기..알지?
만약에 너와 엄마와 형수가 타고 가는 배가 침몰한다면, 나는 형수부터 구한다.
우리 엄마..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결혼이라는 게 그런거야.
내가 네 형수를 가장 먼저 구하고, 그 다음에 엄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동생)를 구할거라 본다.
어쩌면 넌 못구할 수도 있어.


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무심한 형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순간을 네 스스로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절대로 일본에서 자리 못잡는다.
유학 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있어. 그런데 
자꾸만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면 절대로 자립할 수 없어....

쿤은 내가 보기에도 혹독하리만큼 동생의 일본 생활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것이 오히려 동생의 인생을 구하는 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조차 걱정할 정도였지만, 지금와서 보니 그것은 맞는 판단이었다.
동생(시동생)은 일본에서 보기좋게 좋은 곳에 취직을 했고, 결혼도 해서 일본유학의 또다른 성공사례를 보여줬다.


그 이후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내 머릿 속에 빙빙 도는 말은 딱 하나 뿐이었다.

만약에 너와 엄마와 형수가 타고 가는 배가 침몰한다면, 나는 형수부터 구한다

내가 아는 쿤은 부모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결혼 당시에 내게 당부했던 말도, "우리 부모님에게 조금만 신경써줘.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거 밖에 없어. " 였다.
 
그런 그가, 엄마를 두 번째 구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를 먼저 구하고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그의 마음이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더이상 일본행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불과 몇년 전에 우리는 남남이었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무촌인 것이다.
(물론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남남이라 무촌이라고 하는 걸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촌수로만 봐도 어떠한 거리도 없는 우리가 왜 이렇게 멀리서 떨어져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생활은 분명 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떠한 풍랑을 만나도 구해줄 쿤이 있는 한 나는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며칠 후 직장에 퇴직을 고했고, 한 달 뒤인 2월. 한국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완전히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시각 새벽 3시가 넘었다. 
쿤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일본에 들어온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쿤은 내가 저 대화 내용으로 일본행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여전히 시행착오 중인 일본생활이지만, 아직까지 나에게 후회란 없다.